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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노무현, "운명이다", 50~52쪽의 내용 - 부일장학회(현 정수장학회)

시험을 잘봐서 부일장학생으로 뽑혔다. 당시에는 장학회가 별로 없었다. 나는 부일장학회를 운영한 부산일보 사장 김지태 선생을 평생 존경했다. 그는 무려 25년 동안 부산상고 동창회장을 맡아 모교 발전과 인재양성에 헌신했다. 나는 중학생 때 부일장학금을 받았고 부산상고에서도 동창회 장학금을 받았다. 둘 모두 김지태 성생이 만든 장학회였으니 그 분이 내 인생에 디딤돌을 놓아 준 은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5.16이 난 후 김지태 선생은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등 재산을 거의 다 빼앗겼다. 부일장학재단 재산도 모두 5.16장학재단으로 넘어갔다. 그것이 나중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이름을 딴 정수장학재단이 되었다. 거사 자금을 대주지 않았다고 군사 쿠테타 세력이 보복을 한 것이다. 해외에서 돌아오는 사람을 반지 밀수 혐의를 씌워 구속한 다음 협박해서 재산을 다 빼았았다.

나는 변호사가 된 후 언젠가는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관련 자료를 모으고 소송 준비를 했다. 정수장학재단은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사회로 환원해야 한다. 비영리 공익재단이지만 누가 운영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더욱이 정수장학재단은 지금도 부산 지역 최대 신문인 부산일보 주식을 100% 보유하고 있다. 부산일보의 공정성과 신뢰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 그 장학재단은 '범죄의 증거'이며 '장물'이다. 정의를 실현하고 뒤틀린 역사를 바로 세우려면 합당한 자격을 가진 유족이나 시민 대표들에게 운영권을 돌려주어야 한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 백방으로 방법을 찾아보았다.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절차가 없었다. 국민 여론으로 풀어 보려 해도 정수장학재단의 실질적 주인인 박근혜 씨가 야당 대표로 있어서 쉽지 않았다. 야당 탄압이라는 오해와 비난이 일어날 위험이 있었다. 세상이 바뀌긴 했는데 좀 이상하게 바뀌었다. 군사정권은 남의 재산을 강탈할 권한을 마구 휘둘렀는데, 민주정부는 그 장물을 되돌려 줄 권한이 없었다. 과거사 정리가 제대로 안 된 채 권력만 민주화되어 힘이 빠진 것이다. 부당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한테 더 좋은 세상이 되어버렸다. 억울하지만 이것이 우리 역사의 한계일 것이다. 정수장학회 문제만 그런 게 아니다. 지난 날 잘못된 역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 장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소유자가 정권까지 잡겠다고 했다. 그런 상황까지 용납하고 받아들이자니 너무나 힘들었다.